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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좋아하는 시2

강우 - 김춘수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부재 이외의 방식으로도 슬픔을 만드는 이야기꾼이 되어 보고 싶다. 2021. 6. 11.
흰 부추꽃으로(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 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2020.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