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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가제)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농이 흐르고 눈물이 흐르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청진기로 자신을 살핀다 언제부터 있었는가 어디에 있는가 기다려도 깨달음은 없다 수색을 포기하고 눕는다 그제야 희미한 윤곽을 갖추며 심중에 그려지는 게 있다 환부에서 새나오는 농 온몸을 순환하며 무기력증을 유발하는 지독한, 검녹색 농 환부에서 새나오는 눈물 살갗을 타고 흘러 자국을 남기는 찝찔한, 미지근한 눈물 애태우는 마음을 감춘다 어디에서 왔는가 넌지시 물으면 씁쓸한 웃음이 들려온다 너의 궤적은 어떠했나 그 위에서 생긴 수많은 환부들은 과연 너에게서 사라졌나 내 상처에선 고름이 나오지 않고, 내 눈에선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것들을 뿜어내는 비유(非有)의 환부 그리고 그 환부의 수용자인 나. 2021. 6. 11.
강우 - 김춘수 조금 전까지는 거기 있었는데 어디로 갔나, 밥상은 차려놓고 어디로 갔나, 넙치지지미 맵싸한 냄새가 코를 맵싸하게 하는데 어디로 갔나, 이 사람이 갑자기 왜 말이 없나,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내 목소리만 내 귀에 들린다. 이 사람이 어디 가서 잠시 누웠나, 옆구리 담괴가 다시 도졌나, 아니 아니 이번에는 그게 아닌가 보다. 한 뼘 두 뼘 어둠을 적시며 비가 온다. 혹시나 하고 나는 밖을 기웃거린다. 나는 풀이 죽는다. 빗발은 한 치 앞을 못 보게 한다. 왠지 느닷없이 그렇게 퍼붓는다.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고, 부재 이외의 방식으로도 슬픔을 만드는 이야기꾼이 되어 보고 싶다. 2021. 6. 11.
가까운 갈등 새파란 하늘이 스쳐 지나간다. 어찌 그 깊이는 이렇게도 얕은가 땅의 사물들이 빛을 받는다 하루가 지나갈 때 은은하게 빛난다 어째서 숨어 들어가는 양인가 나를 찾아내는 색에 부끄러워진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하늘의 시선을 피한다. 2021. 6. 5.
그 겨울의 행방 겨울은 어디에 있나 칼바람을 타고 든 냉기가 볼을 긁는다 눈도 내리지 않던 그 해 가만히 서서 생각하기를 춥기만 할 뿐인 이 날씨에 계절은 없었다 겨울은 어떤 연유로 도망을 갔는가 이런저런 사념으로 지쳐 갈 때쯤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길가에 세워진 흙으로 만든 눈사람 제법 눈과 코까지 있는 얼굴은 나에게 도리어 미소짓는다 갈색 빛의 얼굴이 웃음으로 전한 건 바람만큼이나 차가운 현실이다 눈사람의 흙을 손에 묻히고 겨울 공기 속으로 또 발걸음을 옮긴다 추위에 맞서 맥이 고동치는 나의 겨울은 어디에 있나 2021. 5. 22.
LoLTE(Love/Loneliness over LTE) 전화를 건다 고요한 방 안에 스며드는 신호음 끊김에 맞추어 숨을 고른다 불빛이 창을 어지럽힌다 단조로운 음악은 끊이질 않는다 강해지던 숨소리도 잦아든다 어둠이 손을 덮는다 귀에서 전화를 땐다 전활 받지 않는구나 연결이 된다면 말할 텐데 내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전활 받지 않는구나 연결이 된다면 들을 텐데 너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마음이 어디로 흘러 가는지 걸리지 않는 전화를 건다 왜일까 의문을 품으며 마음이 수렁을 떠돈다 끊이지 않는 건조한 신호음 2021. 2. 7.
무의(無意) 해왕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해왕성의 고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붙잡혀버린. 그러나 사라지고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희미한 빛을 우리는 눈여겨보지 못한다. 해왕성의 공전에 대해 생각해본다. 밀쳐지고, 당겨지고, 일부와는 삶을 어울리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오묘한 원리를 우리는 감사하지 못한다. 해왕성의 위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항상 가까운, 항상 먼, 엇갈리는 궤도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수많은 길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한다. 해왕성의 빛깔에 대해 생각해본다. 형태 없이 펼쳐져 있는 푸른 바다와 하늘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 쓸쓸함을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만일, 하얀 우주복을 입은 나를 해왕성의 대기에서 놓는다고 하자. 그 황량한 우주에서 나를 놓는다면 붉은 희미한 고리를 바라보며 푸른 고.. 2021. 1. 29.
흰 부추꽃으로(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 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2020. 11. 10.
서울에, 눈 그리던 눈, 서울에 내렸다. 키스 해링의 작품을 보고 나온 뒤, 흥인지문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던 중. 휴대폰 매장에서 나오는 체인스모커의 노래를 듣고 중국어로 말하는 행인을 지나치던 중. 유난히 회색인 하늘을 느끼고 때가 타 검어진 보도블럭을 보던 중 호떡 기름 냄새를 맡고 버스가 지나가며 뱉은 매연냄새에 숨을 잠시 참던 중 눈은 서서히 내리면서 땅에 닿았고 쌓이는 양보다 녹는 양이 더 많아 아쉽게도 풍경을 바꾸진 못했다. 그래도 눈은 내렸다. 공중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것들은 내 시야를 흐리고, 열 걸음 앞을 잘 못 보이게 하였다. 휘날리는 눈발 속에 저층건물이 서 있었고, 버스가 움직였고, 드문드문 사람이 걸었다. 눈 내리기 전과 바뀐 건 없는데, 모든 것이 더욱 생동감 있고, 우울하고, 강인하.. 2020. 11. 10.
탄(歎) 사랑하는 사람아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별빛이다 백야에 홀로 앉아 있던 나에게 문득 찾아온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끝없이 타 들어가던 낮을 차분한 밤으로 바꿔주고 짙은 하늘에 별을 띄워 주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는 별들의 빛깔은 따뜻함이었고, 부끄러움이었고, 또 따뜻함이었다 시간이 지나 서 있던 나에게서 문득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아 연(緣)이 찢겨 나간 나는 홀로 초원에 서 있고 짙은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별을 뭉쳐 만든 흰-푸른 눈이 내린다 사랑했던 사람아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눈밭이다. 2020. 11. 10.
-줄 위를 걸어 가는 광대 -그의 두 팔은 펼쳐지고, 두 다리는 꼿꼿하고,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다. -다만, 그의 미소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의 손만이, 부채를 든 손만이, 펄럭이며, 쉴틈없이 펄럭이며, 그 어색함에 동조해 준다. -그 가는 줄 위에만 서면, 위를 걸어가면, 그는 천성 바보가 된다. -무릎을 꿇는 법을, 팔을 모으는 법을, 울상을 짓는 법을 까먹게 된다.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는 오늘도, 줄 위에서 한 발, 한 발, 또 한 발 내딛게 된다. -손에 쥔 부채는 쉴 틈 없이 펄럭이고, 펄럭이고…… - -그렇게 줄타기는 계속된다. 2020. 11. 10.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낙타, 모래를 털어낸다 흐릿했던 것들이 더욱 흐릿해진다 작열하는 태양 하에 어언 이십 년 때로 소낙비가 오는 날을 축복하고 때로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을 원망했다 오랫동안 걸어왔으므로, 잠시 쉬기로 한다 망망대사(沙)에 무릎을 꿇는다 하늘,과 모래만을 바라본 두 눈은 이내 햇빛 아래 감기기 시작한다 초원이 보인다 푸른 초원에 붉은 사자가 보인다 붉은 사자는 입을 벌려 하늘을 향해 울어짖는다 해변이 보인다 하얀 해변에 어린아이가 보인다 어린아이는 모래를 집어 하늘을 항해 던져올린다 두 눈을 뜬다, 모래와 하늘 만이 보인다 낙타는 기지개를 펴고 무릎을 편다 초원과 해변은 보이지 않는 길 그러나 낙타의 강인한 다리는 그 길을 따라 걷게 되리라 2020.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