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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필&단편5

[수필] 스쳐 지나가는 인연 우리가 평생 만나는 사람들 중 50%는 한 번만 보게 되는 인연임을 아는가? 스쳐 지나가듯 사라지는 수많은 인연. 그 이름도 모른 채 멀어져 가는 사람들. 의과대학 학생의 병원 실습 또한 그렇다. 수많은 사람을 보고,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정확히 그 만큼을 흘려보낸다. 주어진 짧은 시간에 해야 할 것은 많기에, 우리는 그 모두를 보낸다. 환자분들은 보내고 그들에게서 배웠던 지식만 남아 있다는 것은, 어릴 적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고 함께했던 추억만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분과 같다. 단지 조금 더 슬플 뿐이다. 교수님들도 이런 상황이 안타깝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1년 전부터 시작한 ‘장기추적통합실습(LIC)’. 학생과 환자를 매칭시켜 일 년 동안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 목적에는 물론 .. 2022. 12. 28.
예진 (초고) “손가락이 아파요.” 맞은편의 환자가 말했다. 나는 빨갛게 부은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류마티스내과 Y교수님의 진료를 기다리는 분은 정말 많았다. 내 앞에 있던 환자분도 그 중 하나였다. 이 환자분이 다른 분들과 조금 달랐던 점이라면, 오늘 교수님을 처음으로 뵙게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점이 행운이 될 지, 불행이 될 지는 전적으로 내가 얼마나 빨리 환자 예진을 끝마치는지에 따라 달려 있었다. 내가 빠르고 정확한 예진으로 환자 정보를 정리해 교수님께 조리 있게 전달 드리면 환자분은 빠르게 진료를 보러 들어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였다. 수많은 질문들을 환자에게 차근차근 말했다. 모든 증상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질문(“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어떨 때 그러세요?”)은 이제 능숙하게 말할 .. 2022. 8. 20.
[단편] Falling Down 조종간 막대 두 개를 안쪽으로 민다. 프로펠러가 돌아간다. 공기를 찢는 익숙한 소리가 난다. 이윽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일련의 동작을 마치면 드론은 언제나 그랬듯 차분하게 떠 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겨울의 건조하고 찬 공기가 칼바람과 함께 코 속으로 들어온다. 배터리는 52%. 경험상 15분 정도 날릴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조종기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땐다. 눈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햇빛을 받아 수면이 부셔진다. 옅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수놓아져 있다. 아름다운 풍경인가? 눈에 풍경이 보이지만,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니,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그날과 많이 비슷하다. 조종기에서 신호음이 울려 생각을 돌렸다. GPS가 잡혔다는 뜻이다. 억지로 시선을 다시 화면.. 2022. 2. 7.
나, 지금, 여기 시험지의 모든 정보에는 원인과 이유가 있다. 60세 여자 환자가 다리가 부어 있다고 하면 림프절의 이상을 의심한다. 5세 소아가 발열이 있고 기침을 하면 상기도 감염의 증거를 미친 듯이 찾는다. 심지어 창백하다는, 아픈 사람한테는 당연한 말 한 마디에서도 우리는 소적혈구 빈혈이라는 답을 이끌어낸다. 일련의 시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데에 익숙해진다. 나는 시험에 나오는 환자를 종이 환자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직 정보의 나열과 그들 간의 논리적 연결으로만 이루어진 무언가. 우리는 종이 환자를 환자라고 믿는 채 몇 년의 시간을 그들과 씨름하며 보낸다. 나의 삶의 자세 또한 그랬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꼭 그럴듯한 .. 2021. 11. 2.
[단편] TWO Waking(Dreaming) 알람은 울리지 않는다. 길고 긴 시험이 끝난 토요일 아침이다.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잠은 그 자체가 신의 축복이다. 뒤척일 때마다 아주 작은 소리로 부시럭거리는 이불과 요. 그 자체로 멈춰 있는 듯한 공기. 나를 위해 조금은 물러나 있는 어스름한 빛. 창문 너머로 어디선가 들리는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소음. 모두가 어울려 내는 오중주는 나만을 위한 인생 최고의 선율이다. 눈을 뜬다. 눈을 다시 감는다. 오랫동안 있는다. 아직 덜 깨어난 뇌는 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게으르게 받아들이며 머리뼈 속 -자신의 침대-에서 뭉기적거린다. 다시 눈을 뜬다. 눈을 뜬다는 일이 이리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동공 속으로 들어오는 빛은, 내 뇌의 상태와 비슷하게, 몽롱한 빛이었다. 그 빛.. 2020.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