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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며

나를 사랑하자. 진정으로.

by Alternative_ 202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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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나는... 본능에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을 나를 위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내 몸, 육신은 자동차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두 명이 타고 있다.

'본능'이라는 한 명과, '이상'이라는 다른 한 명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응해 보자면 각각 '이드'와 '초자아'에 가까울 것이다.)

그 둘은, 내 안에서, 내가 기억나는 한 가장 오래된 때부터 지금까지 핸들을 두고 싸우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본능이었다.

이 본능이라는 놈은 인간이라는 종류의 동물로서 가지는 아주 기초적인 욕구(식욕, 쾌락욕)와, 특이하게도 '공부'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 나는 아주 기본적인 사회화된 인간으로서의 행동 말고는, 공부에 거의 강박적으로 매진했다. 공부와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는 삶 이외의 삶은 아주 허약하고도 얕은, 날강거리고 언제 찢어질 지 모르는 종이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의 밑천은 누구와 만나도 금새 드러나기 마련이었고, 그 아픔은 나를 절망의 늪에 빠지게 했다.

이 '공부'에 대한 비건전하고 증오스러울 정도의 집착이 어찌하여 형성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나는 이제 이 '본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동안 나를 규정해오고 나를 만들었으며, 내가 따라갔던 '나'라는 이름의 '본능'은

파괴할 수 있을 때까지 파괴해, 철저히 부정시킬 것이다.

나의 행동을 억죄어오는 이 찐득한 '절망의 늪'을 힘차게 걷어내고, 본능에 눌러 언제자 버둥거리고 괴로워했던 나의 이상, 날것으로 존재하는 이상을 이제 바깥 공기와 접촉시켜 현실화할 차례이다.

일시적인 감각적, 본능적 쾌락에 만족하며 사는 삶을 이성의 행동으로 깨어 버리고,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나의 이상이 바라는 나의 모습을 향하며 나의 모습을 변화시킬 것이다.

비록 이 중력이 너무나도 무거워 내 근본적인 모습의 변화는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더 가볍고, 더 아름답고, 최종적으로는 더욱 행복한 삶이 방문할 수 있는, 그런 나의 모습을 만들 것이다.

파괴가 있어야 그만큼의 창조가 있는 법이다.

나의 핵심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것마저 바뀔 필요는 없다. 어짜피 바뀌기도 힘들 것이다.

다만, 본능에 의해 억제되던 나의 사지를 해방시킬 뿐이다.

 

사자의 의지, 그 사자의 의지를 향해.

 


 

아기는 철저하게 본능에 따라 움직이고, 본능의 충족이 쾌락을 발생시킨다.

당장의 입장에서 보면, 아기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것이 부모가 가장 할 수 있는 좋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본능만을 따르는 것을 거부시키고, 그 다음의 삶을 살게 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부모가 해줄 수 있는, 더 나은 방식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이다.

이제는 나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절제해야 할 때가 왔다.

아쉽게도 그걸 실천하는 힘이 내인적인 힘이라 위협받기 쉽겠지만,

반대로 그것은 마음을 먹으면 절대 저항할 수 없는 가장 강력한 힘이기도 할 것이다.

 


 

허나 조심해야 한다. 본능에 의해 억눌려진 나의 삶과 나의 건전한 삶을 분리해야 한다.

학생으로서 학습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더러, 그것은 진정한 본능의 부정이 아니다.

건전한 변화의 핵심은, 나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나 는 잘못되지 않았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자신이 잘못된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나를 부정하면 안 된다. 나를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나의 내면의 갈등을 (다른 양상으로) 파국으로 밀고 가, 나를 낭떠러지로 떨어뜨릴 것이다.

그러기에, 본능의 부정만큼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나에 대한 사랑이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건강한 뿌리를 알고 깊이 박아내려야 본능에 대한 부정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진정한 나 자신이라는 이상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된 나. 지금껏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절망의 늪에 빠진 나를 사랑하라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 해가 되는 부분까지 사랑할 필요는 없다.

다른 조건은 없다. 그저 순수한 나, 아름다운 나를 사랑하면 된다.

그 사랑이라는 것은 단순하고 일시적인 쾌락의 쫒음이 아닌, 나라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정신적/육체적인 면에서의 사랑이다.

부모가 아이를 바라보는 듯한 그 사랑...

그러기에 부모는 위대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깨닫게 된 나.

나를 사랑하기 위한 준비를, 험난하고도 힘든 세월 끝에 마치게 된 나.

 

이러한 나를, 사랑한다.

 

Love in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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