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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며

사람이 사람이기 위함은 - 예수병원 정형외과 서브인턴 수기

by Alternative_ 2022.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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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다.'
나는 초록색 멸균 수건 위에 다소곳이 놓인 흰 손을 보며 생각했다.
정형외과 실습 수업 이틀째. 아직도 수술실의 공기에 주눅드는 실습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가만히 있는 것. 룸메 형들은 그걸 '병풍'이라고 했다. 가끔씩 착한 간호사 선생님들이 의자를 가져다 주신다면 그 수술 참관은 행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수술실 일정이었다. 분주한 수술방에 조용히 들어가 '명당자리'에 자리를 잡으니, 수술대 위에 손이 있었다. 이미 마취와 수술 세팅은 다 끝나 환자분의 온몸이 멸균포로 덮혀 있었고, 수술 대상이 되는 손만이 옆에 놓은 받침대 위로 비쭉 튀어나와 놓여 있던 것이다. 온통 파란색인 수술대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오른쪽 손은 작고 가엾었다.


"시작하겠습니다."
과장님이 오시자 수술이 바로 시작되었다.  이번 수술은 손 골절 때문에 심어놓은 철 고정대(K-wire)를 빼는 수술이었다. 일명 'Removal'라고 불리는 수술로, 간호사 선생님들의 수다로 추론하자면 꽤 간단한 축에 속하는 수술이었다. 수술하시는 선생님들의 동작도 익숙한 듯 거침없었다. 바로 메스로 손등을 가르고, 근육 위치를 확인하고 절개한 뒤, 몇 차례 기구를 사용하자 뼈에 박힌 은빛 고정대가 내 눈에도 보였다.
그 광경은 여러모로 충격이었다. 물론 정형외과 수업에서 수도 없이 뼈에 보철물이나 고정대를 댄 X선 소견을 보았다. 하지만 살점 밑에, 뼈에 박혀 있는 금속을 보니 그 어색한 조합에 사고가 잠시 정지되었다. 매정하리만큼 차갑게 빛나는 그 물질은 뼈를 낫게 도와주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몸 안에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로 보였다. 하지만 이후의 광경에 비하면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간호사로부터 드라이버처럼 생긴 물건을 건내받은 레지던트 선생님이 "이건 다섯 개네." 라고 하셨다. 배운 건 어디 가지 않던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드라이버처럼 생긴 물건'은 진짜 드라이버였고, 선생님이 그걸 손 깊숙히 꽂고 돌리자 그 밑에서 나사가 서서히 올라왔다. 전자제품마냥 어떤 나사는 너무 꽉 끼어 딱딱 소리를 내며 저항하는 점이 못내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었다. 다섯 개의 나사를 빼고 드라이버를 집어 간호사분께 넘겨주자, 이번에는 수상쩍을 만큼 펜치에 가까운 물건이 간호사의 손에서 레지던트 선생님의 손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그 직감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근육 층 사이로 펜치의 머리가 사라지더니, 족히 10cm는 되어 보이는 철사가 뼈에서 나왔다. 도데체 그 가녀린 손에 그런 철심이 어떻게 박혀 있는 걸까. 심지어 철사는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고, 두 번째 철사는 위치가 좋지 않아 펜치로 철사를 꽉 집은 다음 망치로 펜치를 두드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나는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던 이 광경에 어쩔 줄을 몰랐다. 당연히 정형외과를 공부했으니 뼈에 보철물이 있고, 나사가 있고, 철사가 있다는 걸 아는데... 막상 그것들이 하얗고 작은 손에서 나오니 뇌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예과 시절 들었던 의료인문학 수업의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의사들은 환자를 환자라는 인간으로 보는 게 아니라, 치료해야 하는 질환으로 보게 되는 '디커플링'이 자주 일어납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다. 환자의 얼굴과 몸의 대부분은 보이지도 않는다. 손만 보인다. 심지어 그 손에서 금속막대와 나사와 철사가 나오는 마법(?)을 보았다. 그러고 나니 어느샌가, 내 앞에 놓인 사람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의료적 처치를 해야 하는 손'일 뿐. 그 생각이 무시무시하면서도 당연하게 느껴지는 양가성. 그 앞에 나는 놓여 있었다.
그때였다.
"드르렁~
드르렁~ 푸우~"
차가운 수술실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도 몰랐지만, 곧 무균포 뒤 어딘가에서 나고 있음을 알고 무슨 소리인지 깨달았다. 바로 코를 고는 소리였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평소에 코를 고는 사람은 전신마취를 했을 때 코를 계속 골 확률이 높다고 한다. 그 못내 익살스럽고 격식 없는 소리가 온 수술실에 쩌렁쩌렁 울려퍼지고 있었다. 처음 겪어 보는 그 상황의 아이러니에 나는 멸균마스크 뒤로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모순이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누가 들어도 사람한테서 난다고밖에 할 수 없는, 친근하고 푸근한 코 고는 소리. 무균포 밖에 있는 그 손은 그 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의 일부였다. 금속막대와 나사와 철사는 사람을 돕기 위해 사람에게 달려 있었을 뿐. 모든 것은 사람을 위함이었다.
코골이에서 환자가 사람이란 걸 깨닫다니. 그 어이없음에 나는 한번 또 웃었다. 

환자는 한번 더 시원하게 코를 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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