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본적인 틀은 어찌보면 전형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메리칸 포스트 아포칼립스
- 재앙은 외적 요인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주제 또한 전형성에 가깝다. 조그마한 공동체, 생존자들간의 싸움과 약탈, 다른 사람을 경계하는 모습 등등...
- 목사인 아버지와 주인공 딸의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앵무새 죽이기가 생각나는 점도 있다. 마침 주인공의 성격도 앵죽의 주인공 여자아이 스카웃과 비슷한 측면이 많고.
- 하지만 자세히 보다보면 독특한 점이 많다.
- 일단 가장 눈앞에 보이는 것은 처음부터 등장하는 '지구종: 산 자들의 책'의 구절들. 처음에는 본편의 내용과 연관이 없는 듯 해서 뭔가 싶었는데, 중간부터 자신이 발견한 삶의 이치를 정리하고, 이를 내면화하여 더 나은 삶을 만드려는 주인공 로렌의 책이란 걸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이를 보여주는 과정 또한 현실을 보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아버지와 대립하는 딸을 보여 주며, 아버지의 믿음과는 다른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주인공의 내면을 잘 반영한다. 자칫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적으로 나왔으면 나왔지 주인공이 만들기에는 뜬금없다고 느껴질 수 있는 토속 종교적 글감을 자연스럽게 잘 녹여내었다. 물론, 그래도 로렌이 이에 대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가, 주변 사람들이 이를 알아가는 과정에서는 약간의 인위성이 보인다. 먹고살기 바쁘고 당장 하루하루가 위태로운데 지구종에 사람들이 가질까? 오히려 나중에 집단이 커지고 정착할 때 쯔음에, 사람들의 마음에 한창 여유가 생기고 불화가 생길 때 쯔음 지구종이 등장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건 내 개인적인 생각이라...
- 지구종의 모티브는 (내 짧은 식견으로는) 아프리카의 자연적 토속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퍼져나가는 과정은 개신교의 포교와 유사하게 문맹인 사람들에게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쳐 주면서 이루어진다는 점도 굉장히 특이한 요소라고 느꼈다. 마치 역사적으로 일어났던, 아프리카에 개신교가 포교되는 과정을 역으로 뒤집어 미국에서 아프리카 신앙이 퍼져나가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 작가의 African background를 보여주기에 이만큼 날렵하면서도 진실된 방법이 있을까?
- 지구종 이라는 것이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만물의 현상을 포착한 것이고, 인간이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닌 그를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탐구해야 함을 역설하는 주인공의 말이 장르와 맞물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과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기도 한다. 모티브가 된 토속 신앙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진다.
- 다만, 지구종에 대한 부분이 핵심이 되면서도 그에 대한 진정한 이야기는 아직 제대로 다루지 않았는데, 이는 최초의 지구종 공동체가 형성되고 시작되는 이야기를 담은 속편 '은총받은 사람의 우화'에서 다룰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주인공이 여정의 과정에서 아주 큰 고난은 겪지 않았다고 느꼈는데, 은총받은 사람의 우화에서는 지구종 공동체를 생성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위기, 고난, 역경 등이 어떻게 보여질 지 기대된다.
- 또 독특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주인공이 '선을 지키는' 과정. 보통은 주인공이 자신의 신념과 그를 어기고 살생을 해야하는 현실에 고뇌하는 것이 클리셰인데, 여기에서는 주인공이 자신의 선을 확실하게 만들고 오히려 주변 인물들이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케이스.
- 이것도 뭔가 아프리카적 신앙과 연관이 있는 건가? 수렵 사회의 특이성 등등...
- 암튼 주인공 심지가 굳은 게 마음에 든다.
- 재앙이 전면에 prominant하게 드러나 있는게 아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라는 느낌인데, 이것도 나름 신선했다. 나도 인류의 멸망은 무언가 대단한 일이 일어나서가 아니라, 그냥 점차 삶이 악화되며 소멸해 갈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거랑 코드가 맞아서 그런 듯 하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의 마약의 존재도 신선하게 보여주었다. '파이로'라는 불을 지르게 하는 마약이 설정이 신선했다. 게다가 꽤 설득력 있다. 왠지 미래에 진짜로 있을 것만 같은 느낌
- 작품 외적으로.
- 아프리카계 혈통의 주인공을 내세우면서도 '올바름'이 책을 집어삼키지 않은 것부터 일단 마음에 든다. 중반쯤 전까지는 흑인인 것도 눈치채지 못함... 위에 올려놓은 원어판은 흑인 여성이 뙇 하고 들어가 있지만 한국어판은 무슨 우주 SF같은 표지로 되어 있어서 더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근데 다 읽고 나니 원어판 표지 저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방식이 더 좋은데.
- 필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정상 책을 중간중간 끊어 읽었는데, 끊었던 부분에서 다시 시작할 때 전 내용이 기억이 안 난다거나,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서 갈팡질팡하지를 않았다. 아마 필력도 필력이고, 주인공의 입장에서 주인공 근처의 사건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방식도 괜히 산만해지지 않게 하는 좋은 효과가 있던 것 같다. 나는 일인칭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자꾸 삼인칭으로 확장을 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부분은 참고를 좀 해야 되겠다.
-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 들어가는 부분에서 독백체가 안 부자연스럽게 하는 법에 대해서도 배울 부분이 많다. 나는 말 그대로 내가 만든 세계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게만 되는 느낌이 있는데, 이를 말하듯이 독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다시 잘 보면서 배워야겠다.
- 중요한 부분은 아니지만, 한글판 제목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인데. Sower를 번역하기 참 쉽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이게 최선인가... 제목만 봤을 때는 무슨 일본 소설인 줄 알았다. 원본은 성경의 구절인데. 성경 번역판도 Sower를 '씨앗을 뿌리는 사람'으로 번역했나? 차라리 '씨 뿌리는 사람의 우화'나 '심는 사람의 우화'로 번역해도 좋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 결론.
- 누구에게나 추천할 법한, 아주 괜찮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 다만 작가가 말하고 싶은 진국은 속편에 있는데, 속편이 아직 출간이 안 된 것 같다...? (2023.04.03 기준) 원어로 미리 보던가 해야겠다.
- 재밌다. 재미 하나로도 추천할 만 하고, 아프리카적 요소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받아지게 하는 면에서는 더욱 추천.
'Book Review > Literatur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움받을 용기 (0) | 2021.11.25 |
---|---|
데미안(Demian) (0) | 2021.05.09 |
대한민국 소방관으로 산다는 것 : 세상이 멎는 순간 주어진 마지막 기회 (0) | 2021.05.02 |
킬링필드, 어느 캄보디아 딸의 기억 (0) | 2021.04.1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