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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필&단편

[수필] 스쳐 지나가는 인연

by Alternative_ 2022.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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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평생 만나는 사람들 중 50%는 한 번만 보게 되는 인연임을 아는가? 스쳐 지나가듯 사라지는 수많은 인연. 그 이름도 모른 채 멀어져 가는 사람들.

의과대학 학생의 병원 실습 또한 그렇다. 수많은 사람을 보고,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정확히 그 만큼을 흘려보낸다. 주어진 짧은 시간에 해야 할 것은 많기에, 우리는 그 모두를 보낸다. 환자분들은 보내고 그들에게서 배웠던 지식만 남아 있다는 것은, 어릴 적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고 함께했던 추억만 희미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분과 같다. 단지 조금 더 슬플 뿐이다.

교수님들도 이런 상황이 안타깝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1년 전부터 시작한 장기추적통합실습(LIC)’. 학생과 환자를 매칭시켜 일 년 동안 함께 하는 프로그램이다. 그 목적에는 물론 다양한 계통에 이상이 있는 환자를 보며 여러 관점에서 접근하는 감각을 기르고, 다양한 분과의 활동과 그 교류를 보는 등 학업적인 측면도 있었으나, 담당 교수님께서 우리에게 강조하셨던 면 중 하나는 환자와 우리와의 유대(Rapport)였다.

여러분은 이 환자를 일년 동안 보게 됩니다. 환자분이 병원에 오실 때 여러분은 같이 기다리고, 같이 진료에 들어가고, 같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환자가 수술을 받으면 여러분도 수술방에 같이 들어가고, 환자가 입원하면 교수님들처럼 일주일에 여러 번 찾아 뵙게 됩니다. 마치 담당 의사처럼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여러분은 환자분의 다양한 문제를 보게 되고, 교수님들이나 전공의 선생님들이 알기 힘든 여러 가지 사정도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의사와 환자가 서로에게 무엇인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익숙하지 않았던 처음에는 실수의 연속이었다. 환자분이 내원했다는 문자를 받을 때는 다른 수술을 보거나 조별 활동을 하고 있었을 때가 있었고, 일을 매듭짓고 부랴부랴 가면 이미 병원을 나서 뵙지 못했을 때도 있었다. 안과 외래에서 두 시간을 같이 기다려 겨우겨우 진료를 참관했던 적도 있었고, 실수로 다른 환자분의 외래에 들어갈 뻔한 적도 있었다. 병원의 활동에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었기에,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을 거쳐 만나 뵈었을 때에는 고난만큼의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진료실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알기 힘든 것들을 환자분들은 말해 주었다. 아이를 낳기까지 거쳤던 고난에서부터 집안의 갈등,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 친구들과 여행을 간 일. 환자라는 말 뒤에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처음 일 년 동안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놀랐던 게 무색하게도 어느덧 일 년의 실습이 다 되어 갔다. 그 동안 지나갔던 인연처럼 시간은 지났다. 마지막으로 환자분을 배웅해 드릴 때 건강하게 잘 계시라고, 아프지 말아서 앞으로 보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농담삼아 말했다. 환자분은 밝게 웃었다. 처음 뵈었을 땐 웃지 못하던 분이었다.

 

모든 프로그램 일정이 끝나고, 환자분의 정보와 그동안의 기록들을 전부 모아 분쇄기 앞에 섰다. 문서 파기는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두툼한 A4 용지의 두께만큼이나 느껴지는 아쉬움에 잠시 두고 생각해보았다.

끝나고 나서 보니, 결국에는 그 인연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다. 길이의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 인생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 년 또한 짧은 시간이다. 환자를 보고 의학을 배운다는 본질적인 면에선, 실습에서 스쳐 지나간 수많은 환자분들과 그 환자분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그분이 남긴 궤적은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굵고, 조금 더 아름다웠다.

내가 이 수업의 취지에 맞게 배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바쁘게 돌아가는 의학의 세계에서 흔치 않았던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첫 종이를 분쇄기에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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