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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필&단편

예진 (초고)

by Alternative_ 2022.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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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이 아파요.” 맞은편의 환자가 말했다.

나는 빨갛게 부은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류마티스내과 Y교수님의 진료를 기다리는 분은 정말 많았다. 내 앞에 있던 환자분도 그 중 하나였다. 이 환자분이 다른 분들과 조금 달랐던 점이라면, 오늘 교수님을 처음으로 뵙게 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 점이 행운이 될 지, 불행이 될 지는 전적으로 내가 얼마나 빨리 환자 예진을 끝마치는지에 따라 달려 있었다. 내가 빠르고 정확한 예진으로 환자 정보를 정리해 교수님께 조리 있게 전달 드리면 환자분은 빠르게 진료를 보러 들어갈 수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였다.

수많은 질문들을 환자에게 차근차근 말했다. 모든 증상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질문(“언제부터 그러셨어요?” “어떨 때 그러세요?”)은 이제 능숙하게 말할 수 있지만, 각 증상들을 일으킬 수 있는 병에 대해 자세히 알아가는 질문(“혹시 피곤함이 동반되었나요?” “아픈 게 뻗치는 느낌은 없으세요?”)은 아직 잊어 먹기 일수였다. 이 환자분께도 손가락 관절의 통증을 일으킬 수 있는 관절통 종류를 따지고 들어가기 위해 도움이 될 만한 질문들을, 미리 정리해둔 목록을 보며 차근차근 던졌다. 드디어 길고 험난한 질문들이 끝나고, 혹시라도 있을 환경적인 문제를 찾아내기 위한 가벼운 질문들이 있었다. 짜게 드시나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시는 편인가요. 술은 얼마나 하시나요. 담배는 하시나요. 보통 이런 질문들을 할 때쯤이면 어떤 병인지 대략 예상이 그려지기 마련이고, 그 때문에 나도 모르게 긴장은 풀어지기 마련이다. 그 때, 뒤에 서 있던 환자분의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요새 일들이 이것저것 있어서요. 스트레스도 좀 많이 받았고. 술을 좀 많이 마셔요.”

15분 넘게 환자분께 질문을 드리면서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분이 갑자기 한 말이어서 적잖이 놀랐다대체로 대학병원에 오시는 분들은 스트레스가 있으셨지만, 그 분의 말에는 무언가 무게가 있었다.

그러셨군요. 스트레스 받으셔서 관절도 더 아프고 많이 힘드셨겠어요.” 나는 천천히 말했다. 으레 병원에 오는 환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더 하고 싶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하신다. 그러나 이 환자분은 달랐다. 남편과 눈을 마주치고, 힘없는 목소리로 네에…”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입을 몇 번 여신 것으로 보아 말하고 싶었겠지만, 보이지 않는 심리적 벽을 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런 환자에게 무리해서 캐물을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며, 약간 켕기는 마음으로 나머지 질문들을 마무리했다.

 

정리를 마치고 교수님께 내 문진 결과를 요약해서 알려드린 뒤, 교수님은 환자분을 들어오시게 했다. 교수님이 환자분께 드리는 질문은 대부분 내가 알려드린 내용의 재확인이거나 정확한 양상에 대한 자세한 질문이었다. 나와 큰 차이를 보이기 시작한 건, 마지막에 하는 가벼운 질문들에서였다.

왼손을 자주 쓰시나요? 왼손잡이라고 들었는데.”

. 왼손잡이 맞고 왼손을 좀 많이 쓰긴 했어요.”

혹시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주부에요.”

아 혹시 아이가 있으신가요? 몇 살인가요?”

아 다 컸어요. 스물 세 살이에요.”

아 다 컸는데혹시 손을 주로 어디에 쓰시나요?”

청소를좀 해요.”

그때 보호자가 뒤에서 나즈막하니 말했다. “그렇게 내려놓으라 하는데도강박이에요 강박.”

그 말을 들은 교수님은 잠시 환자를 쳐다보았다. 그 사이에 교수님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을까.

요즘 많이 힘드신 일이 있나요? 괜찮아요, 말해 보세요.”

환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교수님께서는 자연스러운 손길로 옆에서 휴지를 두 장 뽑으셨다.

환자분이 추스리시는 동안, 남편 분은 천천히 말했다.

다섯 달 전에 집사람이 상을 당했어요. 그러고 아직 충격에서 못 벗어났는데 아들이. 아들이 자꾸 사고를 치네요. 안된다는 걸 모르는 애가 아닌데. 그래서 많이 힘들어요 지금.”

 

그 상황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물론 교수님의 환자, 아니 사람을 대하는 능력에서도 많은 걸 느꼈지만, 나에게는 그 상황 자체가 깊게 다가왔었다. 스물 세 살 아들. 그 단어가 나에게는 몸서리치도록 사무치는 탓이었다.

문득 어머니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손가락도 아팠을까? 부었을까? 오늘도 아침에 뻣뻣하고 아팠을까?

 

그 환자분을 보내주고 6시가 다 되어가, 교수님은 저녁을 먹으라고 나를 보내주셨다. 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이것저것 챙겨 진료실을 빠르게 튀어나왔다. 그 순간, 밖에서 간호사 선생님과 다음 진료 예약을 잡고 있던 환자분을 발견했다. 남편 분은 잠시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내가 나오는 소리에 환자분은 고개를 돌려 나를 잠시 쳐다보았다. 나를 바라본 그 눈은 아직도 충혈되어 있었을 것이다. 알 수 없었다. 시선을 감히 맞추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 계단을 내려와 버렸다. 계단 중간 쯤에서, 다시 올라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환자분께 힘내라고, 잘 하실 수 있을 거라고 구태의연한 말이라도 해 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그러지 못하고, 나는 계단을 전부 내려와 버렸다.

 

나는 어째서 예진 때 환자분을 똑바로 쳐다보고 다독여드리지 못한 걸까.

나는 어째서 환자분과 만나자마자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걸까.

나는 어째서 계단에서 다시 올라오지 못한 걸까.

그리고 나는 어째서 이걸 글으로만 쓰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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