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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필&단편

[단편] Falling Down

by Alternative_ 2022.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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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간 막대 두 개를 안쪽으로 민다. 프로펠러가 돌아간다. 공기를 찢는 익숙한 소리가 난다. 이윽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일련의 동작을 마치면 드론은 언제나 그랬듯 차분하게 떠 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겨울의 건조하고 찬 공기가 칼바람과 함께 코 속으로 들어온다. 배터리는 52%. 경험상 15분 정도 날릴 수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조종기 화면에서 잠시 시선을 땐다. 눈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다. 햇빛을 받아 수면이 부셔진다. 옅은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수놓아져 있다. 아름다운 풍경인가? 눈에 풍경이 보이지만, 도무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아니, 하나 떠오르는 게 있다. 그날과 많이 비슷하다.

조종기에서 신호음이 울려 생각을 돌렸다. GPS가 잡혔다는 뜻이다. 억지로 시선을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여기서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우선 고도부터 올리기로 했다. 왼쪽 막대를 위로 올리면 드론이 위로 올라간다. 10m. 30m. 50m. 법적 한계치인 150m에 도달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조금 아쉬웠지만, 어차피 높이가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화면에는 드론의 카메라에서 비추는 바다의 풍경이 보인다. 다시금 생각들이, 추억들이 떠오른다. 아까처럼 막으려 해도, 좀처럼 주체가 되지 않았다. 그래. 애초에 떠나보내기로 했는데 생각하지 않는 건 무리였다. 포기하고, 억지로 막고 있던 마음의 문을 열었다.

 

우리가 있었다.

언제부터일까. 나와 너는 우리였다. 눈 마주치기도 부끄러운 때, 같이 놀러 가자 말 꺼내는 것도 버벅였던 때는 길고도 짧았다. 하나의 이어폰에서 나눠 듣는 음악.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청하는 잠.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바라보던 별빛. 세상과 우리밖에 없었다.

마찬가지였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우리가 아니었다. 먼저 꺼내기 힘들어진 말. 먼저 보내기 힘들어진 메시지. 따로 있는 시간들. 우리가 우리가 아니게 된 때는 언제부터였을까. 밤낮을 지새워 고민했다. 이때부터인가? 그때부터인가? 나 때문인가? 그 일 때문인가? 마치 시험처럼 명확한 답을 찾으려 애썼다.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내가 단단히 착각한 것일수도 있었다. 나는 결국 한 번도 제대로 마음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 사이의 관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 추한 변명이 주는 위안 속에서 몇 달간 웅크리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어떤 일도 계기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모든 게 끝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였다. 그저 그랬었고, 그렇고, 그렇게 될 뿐이었다. 세상에 많은 것들이 으레 그렇듯.

결국 마지막으로 나는 지금 무엇이 남아있는지를 직면하기로 했다. 남은 것은 한 줌의 추억, 한 줌의 사진, 그리고 한 줌의 마음이었다. 나는 오늘 그 모든 걸 떠나보내기로 했다.

 

나에게 있는 사진 중 대부분은 드론에 담겨 있었다. 대부분의 일상은 내 폰보다 카메라가 좋은 그 사람의 폰으로 찍었다.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 귀한 찰나의 순간에만 드론으로 사진을 찍었다. 호수 앞에서. 집 옥상에서. 해변에서.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 앞이 흐려지는 순간들이었다. 그렇기에 더욱더 그 사진들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순간들 중에서 가장 강렬한 건 단연 이곳의 기억이다.

 

배터리가 30% 남았음을 알리는 알림이 화면에 떴다. 그래, 이제 시작하자. 오른쪽 막대를 위로 끝까지 민다. 드론을 전진시키는 신호다. 카메라에 비치는 광경이 서서히 바뀌어, 이내 끝없이 펼쳐진 바다밖에 보이지 않는다. 원래라면 남은 배터리를 보며 착륙시켜야 할 시점이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막대를 그대로 밀어 올린 채, 넘실대는 바다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바로 여기, 내가 서 있는 곳. 일년 전 이곳에서 우리는 서로 가장 가까웠다. 이곳에 있었던 카페에서 우리는 커피를 한 잔씩 시키고, 나는 풍경에 감탄하며 드론을 꺼내어 띄웠다. 사진을 정신없이 찍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 났었다. 바다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우리의 뒷모습을 찍자고 했었다. 그 사람도 그러자고, 좋은 추억거리가 되겠다고 말했었다. 그 말이 얼마나 사무치게 다가올지 그때는 알 수 없었다.

비록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을 풋풋한 시절이었지만, 앞에 펼쳐진 드넓은 바다 앞에서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을 생각했었다. 아이러니하다. 지금도 그렇다. 이제 마음을 다잡았다고, 남은 모든 것들을 보내줄 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그 추억에서 벗어나기로 다짐하고 또 결심했는데. 어느새 내 마음속에는 그 사람 생각밖에 없다.

어제 다른 사람과 손을 잡고 걸어가던 걔는,

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을 텐데.

 

날카로운 경고음이 들린다. 배터리가 20% 남았다. 삐빅- 삐빅- 하고 단조로운 소리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묵묵히 전진만을 계속했다. 날아간 거리는 700m를 넘어가고 있었다. 거리와 바람을 생각했을 때, 이미 돌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 나는 남아있는 모든 추억을 이 드론에 담았다. 사진은 물론, 주고받은 메시지랑 전화통화 내역, SNS 메시지까지 전부 드론의 메모리카드에 저장한 다음 원본은 전부 삭제했다. 그 많은 것들을 옮기면서, 마음과 생각들도 함께 꾹꾹 눌러 담았다. 남아있는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기 위해서. 드론은 이 곳에서, 시리도록 푸르고 아름답고 슬픈 이 곳에서 한없이 나아가 마침내는 사라질 것이다.

 

경고음은 한 층 빨라져 이제는 삐---비 하고 사정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배터리가 10% 남아 비상착륙 모드로 들어간 것이다. 고도가 서서히 낮아진다. 그래도 나는 드론에게 전진하자고 했다. 조종기에서 나는 급박한 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카메라에 비춰지는 광경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저 바다가 천천히,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120m. 고도는 꾸준히 낮아지고 있었다. 드론의 궤적을 생각했다. 완만한 경사를 그리며, 아래로 향하는 선. 그 선이 바다에 접하면, 나도 이 추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100m. 90m. 80m.

아니, 나는 알고 있다. 한번 진 흉터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래도 그 흉터를 참 오래도 가지고 있었다. 지우진 못하더라도, 한동안 잊을 순 있을 것이다. 그걸 위한 의식이다. 안녕. 행복했던 순간들.

60m. 50m.

먼 훗날, 인류가 끝까지 발전하면, 바다 깊숙히에서 이 드론을 건져 올려 그 기억들을 다시 꺼낼 수 있을까?

40m. 30m.

몇십 년 뒤일까? 그때면 이 이야기도 담담하게 말할 수 있을까?

20m. 10m.

영원히 남는다. 다만 나에게서 잠시 없어질 뿐이다.

5m. 3m.

또 다른 우리를 위해.

2m. 1m.

보타락 도해. 보타락 도해. 추억은 바다를 넘어 극락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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