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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필&단편

나, 지금, 여기

by Alternative_ 2021.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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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지의 모든 정보에는 원인과 이유가 있다. 60세 여자 환자가 다리가 부어 있다고 하면 림프절의 이상을 의심한다. 5세 소아가 발열이 있고 기침을 하면 상기도 감염의 증거를 미친 듯이 찾는다. 심지어 창백하다는, 아픈 사람한테는 당연한 말 한 마디에서도 우리는 소적혈구 빈혈이라는 답을 이끌어낸다. 일련의 시험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려 하는 데에 익숙해진다.

나는 시험에 나오는 환자를 종이 환자라고 부른다. 눈에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으며,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오직 정보의 나열과 그들 간의 논리적 연결으로만 이루어진 무언가. 우리는 종이 환자를 환자라고 믿는 채 몇 년의 시간을 그들과 씨름하며 보낸다.

나의 삶의 자세 또한 그랬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에는 꼭 그럴듯한 이유가 필요했다. 물이 부족했기에 물을 사러 나갔다. 외롭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만났다. 유급하지 않기 위해 공부했다. 특히 코로나19가 창궐하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화되자, 나는 도무지 움직일 만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하루를 흘려보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그날, 아무런 이유 없이 여행을 떠나게 된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추석 때 우연히 본 비행기 표가 너무 싸서 그랬을 수도 있다.

10월치고 너무나도 더운 햇빛이 나를 살짝 미치게 만들어서였을 수도 있다.

어제 누가 보낸 여행 사진이 예뻐서였을 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유들 중 어느 무엇도, 종이 환자의 병명처럼 명확하지는 않았다.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무언가 홀린 듯 1시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표를 샀다. 지하철은 흐르고, 비행기는 날고, 버스는 덜컹거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바닷가에 있었다. 남원. 어릴 적 추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던 이름만을 따라왔다. 테트라포드에 걸친 다리 밑으로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찢어진 청바지 구멍에서 빠져나온 올이 바닷바람을 맞아 흔들렸다. 따스한 햇빛이 펼친 손바닥 위에 얹혔다. 바로 앞에서, 파도는 흰 거품을 만들며 움직인다. 한달음에 몰려와 거품을 만들고, 산산히 흩어져 밀려 사라졌다가, 다시 몰려와 허공에 세차게 물방울을 튀겼다. 나와 바위와 바다와 파도. 뜬금없이 찾아온 이 곳에는 그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이 곳에 있는 게 이상했다. 어째서 나는 언제나처럼 자취방의 침대에 있지 않은 걸까. 비행기표는 왜 산 걸까. 왜 하필 여기로 왔을까. 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는가. 마치 내가 나를 삼인칭으로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바다가 있고, 바위가 있고, 파도가 있다. 그 사이 어디엔가에 내가 있다. 하지만 도무지 내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불안했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당장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다시 가야 될 것 같았다.

눈을 떴다. 나의 불안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모든 게 평화로웠다. 위로 펼쳐진 하늘은 짙게 푸르렀다. 한 조각 구름이 유유자적 바람을 타고 지나갔다. 발치에서는 파도소리가 이어졌다. 갈매기 한 마리가 시선에 들어왔다. 바람에 맞부딪쳐 마치 멈춰 있는 것처럼 고상하게 떠 있다가, 한참 뒤에 미끄러지듯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갈매기가 떠난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나의 마음에 무언가 슬며시 적셨다.

갈매기가 이 곳에 있는 이유는 뭘까? 갈매기는 왜 이곳에 있어도 되는 걸까?

파도가 솟구쳐 햇빛을 가르고, 하나의 문장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유는 없다. 그냥 이곳에 있을 뿐이다.’

그렇다.

방금 그 갈매기가 바다 위를 지나가는 데에는 아무런 연유가 없다. 그는 그저 날아서 이곳에 왔고, 날아가 지나칠 뿐이었다. 그 일련의 행동에는 이유도, 인과관계도, 정답도 없다. 그저 그럴 뿐이다.

그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드디어 보이지 않던 사슬에서 해방되었다.

바다가 있고, 바위가 있고, 파도가 있고, 파도와 바위 사이에는 내가 있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런 상관도 없이. 내가 있었다. 그 풍경이 더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에는 아무런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멀리서 갈매기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틀 뒤, 이곳의 한적함을 충분히 즐기고, 나는 김해공항으로 가는 비행기에 다시 올라탔다. 변덕스러운 날씨가 몰고 오는 먹구름을 뒤로 한 채,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이곳으로 올 때와는 조금 달라진 나를 싣고, 익숙한 곳으로 다시 떠났다.

 

우리는 종이 환자와 다르다. 이유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너무나도 오랫동안 한 공부로 인해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충분한, 조금은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그걸 깨달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유로 만들어진 사람이 아닌, 사람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돕기 위해 여기에 있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서 보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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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쓰고 나서, 2주가 지났을 때 쯔음이었다.

우연히 빌리게 된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박찬국, 21세기북스)'

무서울 만큼 같은 말이 하이데거에서도 나오고 있었다.

이유가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경이

나는 여행을 통해 그 일부분을 들여다보았다.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필 뿐이다.
장미는 그 자신에도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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