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151 흰 부추꽃으로(박남준)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 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2020. 11. 10. 서울에, 눈 그리던 눈, 서울에 내렸다. 키스 해링의 작품을 보고 나온 뒤, 흥인지문 사거리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던 중. 휴대폰 매장에서 나오는 체인스모커의 노래를 듣고 중국어로 말하는 행인을 지나치던 중. 유난히 회색인 하늘을 느끼고 때가 타 검어진 보도블럭을 보던 중 호떡 기름 냄새를 맡고 버스가 지나가며 뱉은 매연냄새에 숨을 잠시 참던 중 눈은 서서히 내리면서 땅에 닿았고 쌓이는 양보다 녹는 양이 더 많아 아쉽게도 풍경을 바꾸진 못했다. 그래도 눈은 내렸다. 공중에서 쉼 없이 움직이는 것들은 내 시야를 흐리고, 열 걸음 앞을 잘 못 보이게 하였다. 휘날리는 눈발 속에 저층건물이 서 있었고, 버스가 움직였고, 드문드문 사람이 걸었다. 눈 내리기 전과 바뀐 건 없는데, 모든 것이 더욱 생동감 있고, 우울하고, 강인하.. 2020. 11. 10. 탄(歎) 사랑하는 사람아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별빛이다 백야에 홀로 앉아 있던 나에게 문득 찾아온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끝없이 타 들어가던 낮을 차분한 밤으로 바꿔주고 짙은 하늘에 별을 띄워 주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는 별들의 빛깔은 따뜻함이었고, 부끄러움이었고, 또 따뜻함이었다 시간이 지나 서 있던 나에게서 문득 떠나간 사랑하는 사람아 연(緣)이 찢겨 나간 나는 홀로 초원에 서 있고 짙은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별을 뭉쳐 만든 흰-푸른 눈이 내린다 사랑했던 사람아 너와 함께했던 시간들은 눈밭이다. 2020. 11. 10. 선 -줄 위를 걸어 가는 광대 -그의 두 팔은 펼쳐지고, 두 다리는 꼿꼿하고,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다. -다만, 그의 미소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다. -그의 손만이, 부채를 든 손만이, 펄럭이며, 쉴틈없이 펄럭이며, 그 어색함에 동조해 준다. -그 가는 줄 위에만 서면, 위를 걸어가면, 그는 천성 바보가 된다. -무릎을 꿇는 법을, 팔을 모으는 법을, 울상을 짓는 법을 까먹게 된다. -그 어리석음으로 인해, 그는 오늘도, 줄 위에서 한 발, 한 발, 또 한 발 내딛게 된다. -손에 쥔 부채는 쉴 틈 없이 펄럭이고, 펄럭이고…… - -그렇게 줄타기는 계속된다. 2020. 11. 10.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 낙타, 모래를 털어낸다 흐릿했던 것들이 더욱 흐릿해진다 작열하는 태양 하에 어언 이십 년 때로 소낙비가 오는 날을 축복하고 때로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을 원망했다 오랫동안 걸어왔으므로, 잠시 쉬기로 한다 망망대사(沙)에 무릎을 꿇는다 하늘,과 모래만을 바라본 두 눈은 이내 햇빛 아래 감기기 시작한다 초원이 보인다 푸른 초원에 붉은 사자가 보인다 붉은 사자는 입을 벌려 하늘을 향해 울어짖는다 해변이 보인다 하얀 해변에 어린아이가 보인다 어린아이는 모래를 집어 하늘을 항해 던져올린다 두 눈을 뜬다, 모래와 하늘 만이 보인다 낙타는 기지개를 펴고 무릎을 편다 초원과 해변은 보이지 않는 길 그러나 낙타의 강인한 다리는 그 길을 따라 걷게 되리라 2020. 11. 1. [단편] TWO Waking(Dreaming) 알람은 울리지 않는다. 길고 긴 시험이 끝난 토요일 아침이다.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잠은 그 자체가 신의 축복이다. 뒤척일 때마다 아주 작은 소리로 부시럭거리는 이불과 요. 그 자체로 멈춰 있는 듯한 공기. 나를 위해 조금은 물러나 있는 어스름한 빛. 창문 너머로 어디선가 들리는 알 수 없는 조그마한 소음. 모두가 어울려 내는 오중주는 나만을 위한 인생 최고의 선율이다. 눈을 뜬다. 눈을 다시 감는다. 오랫동안 있는다. 아직 덜 깨어난 뇌는 오감으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게으르게 받아들이며 머리뼈 속 -자신의 침대-에서 뭉기적거린다. 다시 눈을 뜬다. 눈을 뜬다는 일이 이리도 편안한 적이 없었다. 동공 속으로 들어오는 빛은, 내 뇌의 상태와 비슷하게, 몽롱한 빛이었다. 그 빛.. 2020. 11. 1. 소설 속 공간에 대하여 안녕하세요. Alternative 입니다. 제 꿈은 소설가입니다. 허접하거나 막연하게 꾸는 꿈은 아닙니다. 저는 책, 그 중에서도 소설을 매우 좋아합니다. 소설의 설정 속에서 작가가 엮어 나가는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느낌이 너무나도 좋습니다. 소설 속의 세계에서 등장인물처럼 생각하며 그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감동하는 느낌. 제 삶의 큰 부분입니다. 이제 욕심이 생겼습니다. 제가 쓴 소설을 누가 밤을 새어 읽을 만큼 좋아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쓴 소설이 누군가의 삶의 한 부분, 기억의 한 부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소설을 쓰지만, 아직 제대로 된 단편 하나도 못 써본 사람입니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제 소설을 재미있게 봐주시고, 조언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 2015. 3. 14. 이전 1 ··· 10 11 12 13 다음